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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학 [genealogy, 族譜學] 정의(계보학,인류학)

족보학 [genealogy, 族譜學]인류학 | 브리태니커 

가계의 기원과 역사에 관한 학문.

조상의 명단을 모아 그것을 계도(系圖)로 작성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족보학자라 한다. 족보는 초보적인 것부터 비교적 복잡한 것까지 다양한 형태가 있으며 모든 시대와 국가에서 보인다. 족보의 범위와 그 관심은 전세계적인 것이며, 학문으로서는 오늘날 주로 유럽과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 국한되어 있지만 모든 문명세계에서 연구되어왔다. 세습군주정치나 귀족정치가 실시되던 나라에서 족보학은 개인적 흥미에서뿐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도 발전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예언자 마호메트의 후손임을 주장하면서 칼리프 자리를 요구할 경우, 여기에는 종교적 의미뿐 아니라 정치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비그리스도교 국가에서는 빈번한 일부다처제의 실시, 첩에 대한 법적 권리의 부여, 양자 제도의 관습 등이 문제가 되어왔다. 족보학이 국제적인 학문이기 때문에 족보에 쓰이는 기호와 약칭을 통일시키려는 노력이 있어왔다. 1928년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제1차 문장학(紋章學)·족보학 대회는 족보학의 전세계적인 기반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다. 많은 나라에 족보연구 단체가 있으며 대학에 전공과목을 두고 있는 나라도 있다.

족보를 연구하는 데 있어 어느 정도의 고문서학 및 연대기 지식은 고대기록의 해독에 도움이 된다. 이러한 지식을 통해 역법(曆法)의 변화내용을 알아내고 통치연대를 측정할 수 있다. 현대언어뿐만 아니라 라틴어와 같은 보다 이전의 언어에 대한 지식은 특히 요긴하다. 옛날의 증서·특허장·인장·주화·메달·깃발·장식천·그림·무덤·비석·기념판 등도 역시 가치있는 지식을 제공해준다. 족보학은 이제 상류층의 혈통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신분, 모든 계층의 가계(家系)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어떠한 능력과 성격이 여러 세대 동안 반복되는가를 검토하는 등 유전적인 면도 고려하고 있다. 구전(口傳)은 문명의 초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기록이 없을 경우에는 암기나 암송이 역사서술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고대 아일랜드 왕들의 계보에 관한 지식은 주로 구전된다. 오랜 역사를 지닌 동양의 족보는 특출한 인물이나 통치자의 것에 국한되어 있다. 인도의 유서 깊은 제후가문의 경우 가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족보가 전부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조작되었는지의 여부를 파악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프리카에서는 에티오피아 황제가 솔로몬과 시바 여왕이 결혼해서 낳은 자손의 후예라는 구전이 있지만 문서로 된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

〈구약성서〉에는 아담·노아 및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보이려는 취지의 많은 계보가 있다. 이러한 계보가 유대교 경전의 일부로 되었을 때 가계를 계속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종족의 순수성이라는 개념에 의해 그 중요성이 더해졌다. 유대인들을 제외하고는 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을 거의 예외 없이 신에게서 태어나는 존재로 설정함으로써 그가 신성한 혈통을 가지고 있음을 보였다. 그리스와 로마의 족보에 나오는 영웅들은 대체로 신이나 신격화된 인간에게서 태어난다.

서양에서 기록이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고대 지중해 지역에서였다. 이곳에서는 구전되어 내려오던 것이 시나 역사의 형태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문자가 발명되었어도 족보학은 여전히 과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족보를 단편적으로만 다루거나 신의 계보에만 주로 관심을 가졌다. 왕들의 전설을 기록하는 작업은 중세 초에 시작되었다. 최초의 연대기 작가는 구전되어온 왕들의 혈통을 기록한 수도사들이었다. 대략 1100~1500년 족보학자들은 귀족과 왕족의 혈통 연구에 집중했다. 여러 사람이 왕위를 주장할 경우에는 종종 계통수(系統樹)가 필요했다. 1286년 스코틀랜드의 왕 알렉산더 3세가, 1290년 그의 직계 상속자인 마거릿이 각각 사망한 뒤 12명에 이르는 왕위 요구자가 나타났을 때가 그 예이다. 진실은 때때로 정치적 목적에서 왜곡되었으나 중세 유럽의 족보기록은 대체로 정확하다. 그 시대에 족보는 혈통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보다는 토지거래·징세·소송 등에 관한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1차적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또한 일반인들의 족보가 출현했다. 이들의 족보는 노예에서 농노로 사람들의 신분이 바뀌던 시기에, 특히 장원관리인이 농노가 아님을 주장하는 사람에 대해 그가 농노임을 증명하려고 할 때 중요했다. 일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시작된 것은 유럽의 족보역사에서 가장 나중의 시기라 할 수 있는 1500년부터이다. 강력한 상인집단의 등장과 중산계급의 부상으로 기록은 더욱 풍부해졌다. 개인의 종교가 강조되던 종교개혁 시대와 군주가 피통치자에 대한 보다 많은 정보를 바라던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기록을 남기고 조상이 누구인지를 규명하는 일이 점점 중요해 졌다. 오늘날 전문 족보학자들은 족보 연구에 있어 적용되는 광범위한 원칙과 수많은 가족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의 족보학에 대해서는 '보학 ' 항목 참조.→ 족보


출처: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19j2922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