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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계보학 소식

이화여대 창립자 스크랜튼 여사 타계 100년 맞아 후손들 방한


할머니가 뿌린 씨, 최고 女大 되다니…"

이화여대 창립자 스크랜튼 여사 타계 100년 맞아 후손들 방한
英·佛·加등 흩어져 있던 4, 5대손 8명 모여
"놀랍고 가슴 벅차… 사랑은 말 아닌 행동 실감
교정 둘러보고 학생들 만나니 조상의 숨결 느껴"

강지원기자 stylo@hk.co.kr6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를 찾은 이 대학 창립자 스크랜튼 여사의 4~5대손인 토마스 데이비스(오른쪽부터), 헨리에타 데이비스, 케빈 게일, 샐리 게일, 폴 애딩턴, 벤 패튼, 안드레아 패튼씨가 이배용(왼쪽에서 세번째) 이화여대 총장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주영기자 will@hk.co.kr1 
6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를 찾은 이 대학 창립자 스크랜튼 여사의 4~5대손인 토마스 데이비스(오른쪽부터), 헨리에타 데이비스, 케빈 게일, 샐리 게일, 폴 애딩턴, 벤 패튼, 안드레아 패튼씨가 이배용(왼쪽에서 세번째) 이화여대 총장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주영기자 will@hk.co.kr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사는 회사원 케빈 게일(47)씨는 2007년 10월 한 여성에게서 난데없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가 얼마 전 인터넷사이트(www.ancestor.com)에 올렸던 가계도(家系圖)를 보고 걸려온 전화였다.

수화기 너머의 여성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메리 F. 스크랜튼 여사의 후손이신가요?" "네, 제 아내 샐리 게일의 고조 할머니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전화를 건 사람은 스크랜튼 연구가인 엘렌 스완슨(56ㆍ 여)씨였다.

이 전화 한 통으로 10년 가까이 스크랜튼 여사의 후손을 찾아 다녔던 스완슨씨의 노력만이 결실을 맺은 것은 아니었다. 이화여대 창립자인 스크랜튼 여사가 타계한 뒤 100년 가까이 끊어졌던 스크랜튼가(家)와 한국의 인연이 다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6일 이화여대 교정에서 만난 벽안의 남녀 8명은 게일씨 부부를 포함해 스크랜튼 여사의 4~5대손들. 4일 방한한 이들은 1909년 스크랜튼 여사가 타계하고 그의 아들 윌리암 스크랜튼이 가족과 함께 한국을 떠난 뒤, 스크랜튼가 사람으로서는 꼭 100년 만에 한국을 찾은 것이다.


영국, 프랑스, 캐나다 등 전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후손들은 이화여대 교정을 둘러보면서 "너무 놀랍고 가슴 벅차다"고 했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고조 할머니가 뿌린 씨앗과 그로부터 싹이 튼 풍성한 가지들을 보는 후손들의 감회는 남달라 보였다.

스크랜튼 여사 외아들의 둘째 딸의 손녀인 샐리 게일(47)씨는 "스크랜튼 여사의 사진이 크게 걸린 대강당에서 경건하게 진행되는 예배를 보면서 감격스러웠다"며 "고조 할머니가 한국에 전하고 싶었던 것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남편 케빈 게일씨는 "며칠 동안 스크랜튼 여사의 흔적을 되짚으면서 내 인생도 큰 영향을 받았다"며 "(여사가) 사랑은 말이 아닌 행동이라는 걸 보여준 인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이들에게 한국은 그저 낯선 나라였을 뿐이었다. 샐리 게일씨는 "메리 할머니가 '은둔의 나라'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학교를 세웠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에게서 듣고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화여대라는 학교 이름도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스크랜튼 여사의 셋째 손녀의 손자인 벤 패튼(48)씨는 "스크랜튼 여사의 네 손녀가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한국에서 가져온 엽서를 서로 교환해 액자로 만들어 둔 것을 본 적은 있다"며 "하지만 한국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는 잘 몰랐다"고 말했다.

100년간 끊어졌던 인연의 고리를 다시 잇게 한 것은 스완슨씨의 호기심과 집념이었다. 그는 국내 지방의 한 대학에서 영어강사로 재직하다 1997년 한국인 제자가 선물한 화보집에서 스크랜튼의 이름을 발견했다. "제 고향인 미국 코네티컷주 메디슨 마을에 스크랜튼이란 성씨가 흔해 여사가 제 고향 출신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000년 미국에 돌아간 스완스씨는 고향 마을을 수소문하며 여사의 흔적을 찾다가 아예 직장까지 그만두고 '스크랜튼 뿌리 찾기'에 나섰다. 결국 2007년 한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진 가계도를 통해 샐리 게일을 찾았고 그를 통해 캐나다 영국 등에 살던 다른 후손들도 하나 둘 찾아냈다.

스크랜튼의 후손들이 여러 나라에 흩어지게 된 것은 스크랜튼 여사의 하나뿐인 아들인 윌리암 스크랜튼의 네 딸들이 미국과 영국 등의 외교관들과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올해 초 이화여대에 "후손을 찾았다"는 반가운 소식을 알린 스완슨씨는 "단순한 호기심에 시작했던 게 10년이 넘게 걸렸다"며 "메리 스크랜튼 여사가 한국에서 일군 업적은 매우 중요하며, 그 정신을 미국으로 가지고 가야 한다고 여겼다"고 말했다.

스완슨씨는 후손들의 도움을 얻어 스크랜튼에 대한 연구를 더욱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샐리 게일씨도 "연구가 잘 진행돼 우리 후손들도 스크랜튼의 활동 영역과 의미가 담긴 자료를 수집해 소장하고 싶다"면서 "나의 후손들에게도 조상의 업적에 대해 들려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화여대 전신인 이화학당을 창립한 스크랜튼 여사는 한국 근대 여성교육의 선구자였다. 1885년 6월 선교사로 한국 땅을 밟은 이래 국내 최초의 여성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 설립을 주도하고 여성문맹 퇴치를 위한 교육활동을 펼쳤다.

스크랜튼 여사 서거 100주년 행사를 열고 있는 이배용 이화여대 총장은 "스크랜튼 여사는 한국에 올 때부터 한국인을 내 민족이라 여겼고, 양성평등 시대를 열었으며, 여성에 대한 사랑으로 많은 여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줬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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