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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조선중후기 계보학/가문이야기

여흥민씨 2대 재앙 by famtree

 여흥민씨 2대 재앙 
여흥민씨 민사용 가문은 약1540년 부터 민유중의 딸이 왕비가 되기 전인 1680년 까지 약140년 동안 황금 기이었다. 왕비의 힘을 업었다는 혐의가 없는 이 시기야말로 민사용 가문의 참모습이다. 왕실의 힘이 작용 하지 않은 제 힘으로 가문을 대성시킨 본보기로 조선조 유명 가문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인물들의 성공이 눈부시고 집안이 창성하여 뭇 사람의 우러름을 받았다. 왕실에서 이 집을 가만 두지 않았다. 마치 인기 절정에 있는 오늘날 TV의 앵커를 권력층이 가만 두지 않 는 모양으로 권부의 얼굴 제1 마담으로 뽑아 데려가 버렸다. 이로써 TV 방송국이 권력에 오염되고 편파 방 송을 하여 비난을 받듯이 민사용 가문도 왕궁의 브랙홀로 빨려 들어가 외척의 득세라는 비난의 물꼬를 텄 다. 민유중의 딸이 숙종의 계비[인현왕후]로 책봉이 된 1681년 부터 왕비에서 폐해진 1689년 까지 왕후 재 위 8년 동안의 영화가 장희빈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다. \"호사다마\" 라는 말이 맞다. 좋은 일에는 마가 자 꾸 끼이는가 보다. 조선 천하 절색 장희빈의 눈에 고압의 전류가 흘러 숙종의 가슴이 찌릿 찌릿......해지고 오금이 후들 후들해져 버렸다. 우암 송시열도 감전사를 당하고 왕비의 친정 민유중 가문은 폐가로 변했다. 왕후를 버리고 장희빈에게 빠졌던 과오를 후회하는 숙종은 그 뒤 민유중 가문에 두텁게 사후 보상을 하 였다. 옛날의 명성을 회복하고 가문이 더욱 번성했다. 언제 비극이 있었냐는 듯 가문의 영화가 불꽃처럼 성대해졌다. 민유중의 5세 손인 민치록의 딸이 고종의 비가 되었다. 마라는 것은 좋은 일이 쌓이는 꼴을 보 지 못하는 성깔이다.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이 집을 집적거렸다. 시집 어른과 남편[숙종]에게 순종하는 인현왕후 같은 며느 리를 고른다는 것이 자기 보다 고수인 정치 9단 여걸을 모르고 데려 왔다. 이로 말미암아 용호상박 진검 승 부가 벌어져 대원군이 KO패를 당하고 왕궁은 민씨 친위 부대로 철옹성을 쌓았다. 여우 피해 가면 범을 만난다더니 대원군을 무너뜨리고 나니 대륙의 문간방에 머슴 같이 있던 일본이 마 치 6.25 때 머슴이 죽창 들고 주인 찔러 죽이듯이 동서양 문물의 격변기를 타고 낭인을 시켜 명성황후를 무 참하게 도륙했다. 명성황후가가 죽은 것은 민유중 가문의 사형선고이면서 조선조의 멸망이다. 민사용 가문은 2대 재앙을 만나 쑥대밭이 되고 목불인견의 상태로 변했다. 명성황후의 죽음이라는 미증 유의 민족 불행 속에서 특히 민유중 가문은 마치 핵폭탄을 맞은 듯하다. 다른 것은 재건이 가능하다. 단지 하나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깊은 상처가 있다. 그 놈의 머슴이 금지옥엽 같이 키워 놓은 딸 8명을 강간 하여 몸울 더럽혀 놓고 데려가 금은보화로 치장시키고 백작, 남작, 자작 등의 수놓은 옷을 입혀 마리화나 연기 속에서 광란의 성관계를 계속하다가 죽였다. 그 뒤 핵폭격을 맞은 현장이 13대 경제 대국으로 바뀐 번화가가 되어 그 곳에서 월드컵 축구 4강을 알리는 꼴이 터졌다. 그 함성 속에서도 그 머슴이 쳐놓은 덫에 걸려 문간방으로 끌려 가던 민씨 가문의 딸 8명에 대한 아픈 기억이 아직도 우리 국민 모두에게 생생하다.

여흥민씨 2대 재앙      한국명문 (2004-06-13 오후 3:55:06)   Hit : 140   Vote : 11        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