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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조선중후기 계보학/가문이야기

[명문가탐방] 여흥민씨만 왜 단죄의 대상인가 ? 2 by familytree

여흥민씨만 왜 단죄의 대상인가 ? 2      

일제는 독립을 부르짖는 우리 동포들을 감옥에 가두고 갖은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주리를 틀고 목 에 칼을 씌우고 발에 쇠사슬을 채우고 단근질,채찍질,전기질, 바늘로 손톱 밑과 발톱 밑을 쑤시는, 수족을 달아매는,콧구멍에 물붓는,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모든 악형을 가하였다." [이것은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문의 일부이다.] 이런 가운데 안동김씨 김생해 가문도 일제의 귀족이 되어 조국을 배반한 자가 4명이 나왔 다.그 중에서 김성근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김성근은 1835년 판의금부사 온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원 김상용의 후손으로 김방행의 증손이다.1835 년에 태어나 1919년에 졸했다. 1862년 문과하여 1902년 탁지부 대신을 지냈으며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의 자작이 되었다. 김성근이 자작이 된 후 한달 만에 죽고 김호규가 자작을 이어 받아 감격한 나머지 "매일신 보"에 글을 올리기를 "....... 반도 2천만 민중이 열망하여 오던 바이니 아등은 감격과 흥분을 금할 수 없 다."고 외치며 일제의 호국의 신이 되라고 조선 청년에게 호소했다. 김종한은 이조참판 김경진의 아들이다. 역시 선원 김상용의 후손이다. 김종한은 1844년에 태어나 1932년 에 졸했다. 이조참판을 궁내부 대신서리 등을 지냈다. 이완용을 필두로 움직이는 정우회의 총재직을 맡아 친일 여론 조성에 앞장섰다.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의 남작이 되었다. 3.1 운동이 일자 "독립"이나 "공화" 등 의 단어 조차 모르던 미개국이 청국의 속국이 되는 일보 전에 일본이 청국과 싸워 이겨 주니 공도 모르고 소란을 일으킨다고 제 민족을 저주했다. 그 외에도 김병익과 김학진이 있다. 김병익은 우찬성 대근의 아들이고,공조판서 한순의 손자이며,이조판 서 이양의 증손이다. 1860년 문과하여 공조,형조 등의 판서를 지내고 한일합방 때 남작이 되었다. 김학진 은 이조판서 김병교의 손자이며, 청음 김상헌의 후손이다. 김학진은 여러 조의 판서를 지내고 남작이 되었 다. 안동김씨 김생해 가문 뿐만 아니다. 반남박씨 박소 가문도 조선조에 대한 반역 행위자가 4명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큰 도적이 나왔다. 조선조에는 대동강 물을 팔아 먹은 봉이 김선달, 서슬이 시퍼런 권문세가 와 속이 시커먼 부호들의 재물을 턴 임꺽정 등 별의 별 도적이 다 있었으나 500여 년만에 나라를 팔아 먹은 도적은 처음 나왔다. 을사년[1905년]에 그 도적이 한 명도 아니고 다섯 명이 한조가 되어 나왔다. 우리 후 손이 아무리 관용을 베푼다 해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도적들이다. 바로 을사오적이다. 을사오적에는 안동김씨도 없고 여흥민씨도 없다. 그런 곳에 반남박씨가 끼여 들었다. 조선조 최강의 가문 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세도정치의 덫에 걸리지 않은 반남박씨가 을사년에 생긴 도적의 패거리에 가담 을 하고 말았다. 반남박씨로서는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 어찌 그것이 반남박씨에 그칠 일인가 ? 을사오적 박제순 이외 박기양,박제빈, 박영효 등이 조국을 배반하고 일제의 작위를 받았다. 이 반역자들 중에 박영효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철종의 사랑스런 사위로 갑신정변의 주역이 아 닌가 ?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과 조국 근대화의 사명을 띈 선각 정객 제1호가 아니던가? 2천만 동포 의 기대가 그 한 몸에 있지 않았던가? 어찌 그 훌륭한 식견으로 일제의 그 유혹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리 쉽 게 빠져 버렸는가? 정신을 가다듬고 위를 조용히 살펴 보자. 여흥민씨 민유중 가문에게만 그 책임을 돌릴 수 있겠는가 ?

한국명문 (2004-06-16 오후 10:12:57)   Hit : 127   Vote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