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구]조선중후기 계보학/가문이야기

만산 강용 선생 행장

만산(晩山) 강용(姜鎔) 선생 행장

 

 공의 휘(諱)는 용(鎔)이요, 자(字)는 계명(季明)이요, 호(號)는 만산(晩山) 혹은 정와(靖窩)라 한다. 강씨의 상계에 선조 휘(諱) 시(蓍)는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지고 공목(恭穆)이란 시호가 내렸다. 강시(姜蓍)의 아들 휘(諱) 회중(淮仲)은 호(號)가 통계(通溪)이며 보문각 대제학을 지냈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의(義)를 지켰다.

 

 강씨는 조선조에 들어와 명경(名卿)이 배출되고 널리 이름난 성씨가 되었다. 휘(諱) 위빙(渭聘)은 호(號)가 서호(西湖)이며 병자호란을 맞이하여 세자익위사 익위[세자 경호실장 격]로 배종(陪從)하였다.묘사(廟社)가 강화도로 들어갔을 때 청나라 오랑캐들과 맞서 저항하다가 순국하여 이조판서에 증직 되고 충렬(忠烈)이란 시호가 내렸다. 3세(世)를 내려가 휘(諱) 재보(再輔)는 성건재 찬(酇)의 아들로 충렬공 손자인 천여(天輿) 후(後)로 입양(入養) 계대(繼代)되었다. 또2세(世)를 내려가 휘(諱) 색(氵+索)은 공의 고조부가 되며 세자시강원 필선 강운(姜橒)의 시종(侍從) 추은(推恩)으로 첨지중추부사의 벼슬이 내렸다. 필선 송서공 강운(姜橒)은 문장(文章)이 뛰어나고 경술(經術)에 밝아 당대에 크게 추앙을 받아 세상 사람들이 송서선생(松西先生)이라 칭송하였다.

 

 

 참판공 필응(必應)은 호(號)가 만대(晩對)이며 성건재의 후손 우와(愚窩) 석(析)의 아들로 송서공의 사자(嗣子)가 되었다. 이의공(吏議公) 하규(夏奎)는 호(號)가 백초(白樵)이며 백씨 현파 한규(漢奎),계씨(季氏) 늑암 진규(晉奎)와 함께 3형제가 연이어 조정에 나가 청현직(淸顯職)을 역임하고 경재(卿宰)의 반열에 들었으며 문학과 중망이 높아 향족(鄕族)에 아주 드문 일이라 하였다. 모친은 충재 권벌의 후손으로 처사(處士) 재홍의 딸이며 정숙(貞淑) 다정(多情)하여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다.  

 

 공은 헌종 병오년 12월 20일 춘양현 유교리[소지리, 수청거리] 사제(私第)에서 출생하였다. 외모는 단정하고 장중하며 품위가 있었다. 눈에 어리는 빛이 맑고 형형(泂泂)하였다. 송서 강운(姜橒)의 장손자 현파(玄坡) 한규(漢奎)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윤리 도덕에 뛰어났다. 식견과 깨달음이 밝게 빛이 났다. 현파는 공을 유달리 사랑하였으며 문호를 크게 열어 명망을 드높이리라 믿었다. 제배(儕輩)들과 어울려 놀 때에도 외설한 놀이나 장난을 하지 않았으며 장엄하고 정중하면서 자기 주관이 뚜렷하였다.

 

 공은 외가에 문안을 드리려고 갔을 때 갑자기 날이 어두워졌다. 돌아오는 길에 호랑이가 나타나 뒤따르기도 하고 앞서기도 하였다.그러나 공은 놀라는 기색이 없이 침착하였으며 천천히 여상스럽게 걸어가자 그 제서야 호랑이가 꼬리를 슬며시 내리며 마을 쪽으로 사라졌다. 그 마을 북쪽에 사람이 살지 않고 버려두어 낡은 집이 있었다. 그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으스스 한 곳이다.  세상 사람들 입소문에 의하면 그곳에는 괴상하게 생긴 귀신이 있어 사람들의 앞길에 닥칠 곤궁과 영달을 감식하여 준다 하였다. 공은 그 이야기를 듣고 한 밤중을 틈타 그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 보러 혼자 갔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공의 담력에 대해 모두 감복하였다.

 

 

 계해년에 박실 생질의 집에 놀러 갔다. 그 집은 법도가 엄하고  문예가 일찍부터 성하였으며 의젓하고 화려하며 범절이 아름다웠다.마치 꽃이 흐드러진 것 같고 정련 된 모습이었다. 때마침 정재 유치명 선생의 상기(祥期)를 맞이하였다. 공은 늦게 태어나 정재 선생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어 학업을 청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공은 횡거 장자(張子)와 범문정공(范文正公)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제문을 지어 정재 유치명을 존경하고 사모하여 우러러 보는 뜻을 나타냈다. 그리고 증조부 송서 강운과 정재 유치명을 비롯하여 당대의 문단(文壇)을 풍미하던 현사(賢士)들의 사장(詞章)을 기리는 뜻의 제문을 바쳤다. 그 제현(諸賢)의 아름다운 일들에 연유하여 수삼(數三) 동지(同志)들을 이끌고 상선암(上禪庵)으로 가 기거하며 추서(鄒書)의 일부를 소중하게 여기며 맹렬하게 읽고 깊이 생각하였다. 차록(箚錄)에 의심스러운 곳은 인숙(姻叔)인 역서 유치유(柳致游)에게 아뢰고 질문을 하였다. 유치유는 공의 장인인 승지 유치호의 아우이며 정재 유치명과 함께 경학과 문장으로 전주유씨 박실이 자랑하는 석학의 일인이다. 유치유는 공의 질문에 대하여 돈독하고 진실하게 답변을 해주었다.

 

 공은 가학(家學)에 힘을 쏟았으며 진실 되고 바른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학문의 지름길은 기초를 튼튼히 하여 원대한 것에 이르것이라 생각하고 항상 자신을 면려(勉勵)하였다. 처가의 인척(姻戚) 중에는 문장과 도학으로 저명한 이들이 많았다. 그 중에 유치명의 아들 세산 지호(止鎬), 수정재 유정문의 손자 석은 기호(基鎬), 호곡 유범휴의 장증손(長曾孫) 건호(建鎬) 등 제공(諸公)은 공보다 20여 년 연장자들이지만 나이를 꺾어 공에게 제절(諸節)을 다하였다. 제공(諸公)들은 공이 칭송을 듣는 가문에서 크게 기대를 하는 재목이라 생각하여 공이 비록 약관의 나이지만 외우(畏友)로 중히 여겼다.

 

 

 계유년에 부친은 북청부사에 제수되었다. 공은 부친을 따라 가게 되어 영의정 이유원을 찾아뵙고 그곳으로 떠난다는 인사를 올렸다.이 자리에서 이유원은 공에게 경계(警戒)하여 이르기를, “번화하고 화려한 가무(歌舞) 성색(聲色)은 일장춘몽(一場春夢)과 같이 오래 가지를 못한다. 북청에 머무는 동안 재주와 기국을 크게 드러내지 말고 원대한 포부를 스스로 기약해야 한다. 명재상은 이와 같이 하여 당세에 중히 여겨졌다.”고 하였다. 공은 북청 관아로 돌아가서 벽에 그 말을 써 붙여 놓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훈계가 되는 잠언(箴言)으로 하였다. 세상사에 연연하지 않고 그 뜻을 오로지 전념하며 그 글을 소리를 내어 읽었다. 중요 관문이요 북방의 거진(巨鎭)인 북청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하였다.

 

 그곳에는 대동사(大同寺) 신창포(新昌浦) 동정수(東井水) 등의 명승지가 있었다. 이들을 관광할 시 북청부의 고위직 자제들과 문사(文士)들과 함께 완상하며 마음껏 풍광을 노래하였다. 그러나 혹시라도 머무는 곳에 폐를 끼칠까 두려워하여 사전에 모임을 통보하지 않고 몰래 다녀오도록 하였다. 혹시라도 누가 선물이라도 주면 그때마다 말하기를, “만약 어떤 떳떳하고 바른 용도의 물건이라면 반드시 소요 되는 곳이 있을 것이요, 만약 어떤 바른 용도가 아니라면 공이 머무는 관아에 무슨 덕이 되겠는가? 하며 물리쳤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그 뒤부터 두 번 다시 그러지 않았다.

 

 예조참판을 지내고 위정척사의 만인소를 지어 올렸다가 귀양살이를 하는 계부(季父) 강진규가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에 조카가 되는 공은 남도로 귀양을 간 계부의 안부를 여쭙지 못하는 것을 늘 한으로 여겼다. 공은 어버이가 연노해서 봉양하느라 그곳에 가서 시중을 들며 안후를 여쭙지 못한 채 여러 달을 보낸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계미년에 부친 이의공(吏議公)이 앓아눕게 되었다. 공은 혁대를 풀지 않고 눈을 붙이지 않은 채 화로에 탕약을 끓이고 내의 등을 반드시 몸소 세탁하면서 시중을 들었다. 부친의 수명이 경각에 놓이게 되자 하늘에 기도하기를, “아버지의 상고(喪故)를 자기가 대신하여 달라”고 하였다. 마침내 상(喪)을 당하여 정해진 의식과 예절을 그대로 다 지키며 너무 슬퍼한 나머지 자신의 생명을 잃을 뻔하였다.상중(喪中)에 진흙으로 지은 초막에 기거하면서도 소업(所業)을 폐(廢)하지 않았다. 젊어서 공령문(功令文)에 힘써서 문장이 정교하고 주도면밀하였다. 성망(聲望)이 있어도 자기를 낮추고 남을 허여(許與)하였다. 과거장에 나가면 대소(大小) 경전(經典) 해석에 여러 차례 수석을 하였다.

 

 문득 예부(禮部)에 문제가 생기면 공(公)은 그 동안의 적공한 바를 드러내서 받들어 풀고 도왔다. 그러나 세도(世道)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을 개척하는 데는 뜻을 두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기를 앞세우고 남의 집 재물이나 여자를 몰래 탐내는 따위의 행동이 쌓이게 되어 마침내 곤궁하고 뜻을 이루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면 스스로 덕을 쌓을 생각은 않고 신세 한탄만 하게 된다. 그러나 공은 사자심근(四字心近) 등의 서책을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그리고 극진하게 탐구하였다. 공은 이와 같이 덧없는 세상의 헛된 영화를 추구하지 않고 담박한 생활을 즐겼다.

 

 고종황제 경자년 영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신축년에 홍릉감조관에 임명되고 통훈대부에 승차하였다. 임인년에 통정대부 중추원의관이 되고 주임관에 서용되었다. 시사(時事)가 날마다 그릇되어 결연히 당세에 출사(出仕)할 생각을 접어 버렸다.사직이 무너지고 해동의 강토가 가라앉는 변을 당하여 우국(憂國)충군(忠君)의 노래를 하였다. 그 정성은 충정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난 것이다. 일찍 매국노를 꾸짖는 상소를 하였으나 뜻과 같지 않게 되자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닦으며 말하기를, “초야의 한사(寒士)가 옛날 선비들이 명예롭게 죽었듯이 그렇게 죽을 마땅한 장소가 없노라! 그와 같은 절개를 지킨 이는 오직 시랑 도연명의 정절(靖節)이 있을 뿐이라.”하였다.

 

 

 공은 살만한 곳을 가려 거처를 정하고 그 구역 일원에 정자를 짓고 태고정(太古亭)이라 편액하였다. 또한 그 주위의 바위를 만취(晩翠)라 하고 소(沼)를 세심(洗心)이라 하고 대(臺)를 망미(望美)라 하고 헌(軒)을 칠류(七柳)라 하였다. 바같 세상일에 대해 일체 사절(謝絶)하였으며 고당(高堂)에서 마음이 평정해지도록 수양하였다. 그 곳의 이름을 정와(靜窩)라 하였으니 마음이나 정신을 편안하고 고요하게 한다는 뜻이다. 임천(林泉)에 깊이 은거하였으며 삼분(三墳)과 오전(五典)은 넉넉하였다. 일월을 한가하게 즐기며 성령(性靈)을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수련(修鍊)하였다.

 

 나라가 망해 영고성쇠의 무상함을 뼛속 깊이 깨달으며 그것을 노래한 지 수십 년이 되었다. 갑술년 여름 쇠약해졌으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책상에 앉아 손님과 친구들이 권하는 약물과 음식을 내치며 말하기를 “죽지 못한 고신(孤臣)이 들창 아래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죄(罪)라” 하였다. 그리고 또 절규와 같은 한 마디를 내뱉기를,“어느 때 광명의 해를 다시 볼 수 있으랴! 임금께 보답하지 못한 이 한(恨)을 그 누가 알겠는가.” 하며 임종을 맞이하여 눈물이 턱을 가로 질러 흘러 내렸다. 바로 누워 온화한 모습으로 생을 마치니 향년89세다. 9월 6일 봉화 구읍 뒤 산기슭 간좌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상여의 동아줄을 잡은 이들이 수백명이나 되었다.

 

 

 공의 배위 숙부인 전주류씨는 형조참의 치호(致好)의 딸이며 능서랑(陵署郞) 수정재 정문(鼎文)의 손녀로서 법도가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전주류씨는 정숙하고 아름다우며 효성이 지극하고 온순하였다. 집안을 다스림에 부지런하고 성실하였으며 남편의 매사를 돕고 받쳐 주었다. 그런 결과 복록을 누려 부부가 혼인한 지 예순 돌 되는 날에 잔치를 베풀고도 더 오래 살아 80이 넘은 복(福)노인(老人)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그래서 전주류씨는 착한 사람은 복을 고루고루 받는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고 하였으며 모든 사람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세상에서 최고라 하였다. 전주류씨는 공과 같은 해 태어난 동갑내기로 공보다 9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봉화 상동(上東) 쪽의 봉서동 두렁길 북쪽에 묘를 썼다.

 

 공은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 아들 필(泌)은 참봉을 지냈으며 슬하에 6남(男)2녀(女)를 두었다. 맏은 교원(敎元)이며 둘째는 참봉 도원(度元)이며 출계(出系) 하였다. 그 다음은 승원(昇元) 만원(晩元) 세원(世元) 욱원(郁元)이다. 2녀는 이명호 김원재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교원은 아들 희목(熙穆) 희조(熙祚) 희중(熙仲)을 두었으며 딸은 김직현 이원광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그 다음 딸은 어리다. 도원은 아들 희운 희건을 두었으며 딸은 김중욱 손병문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그 다음은 어리다. 승원은 아들 희탁(熙琢) 희구(熙球)를 두었으며 딸은 그 다음 아들 딸은 모두 어리다. 이명호는 아들 원정 원경 원준 원철을 두었으며 김원재는 아들 각현을 두었다.

 

 아! 슬프다. 공은 청명(淸明)하고 사물에 통달하였으며 민첩한 자품을 지니고 태어났다. 여러 대를 두고 문장을 가학으로 승습한 가문에서 일찍부터 바탕을 닦고 단서를 마련하여 덕성(德性)을 이루어 자애롭고 신실하였다. 규모는 빈틈이 없이 세심하고 신중하였다.비록 일찍 일정한 일에 마음을 다하여 일함에 각각의 작은 힘을 근본에 힘을 썼다. 장래를 향해 비상(飛上)하려는 뜻은 시속(時俗)에 따라 대비하며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웠다. 흘러서 순환함에 더러운 것이 마음에 남으면 모르는 것을 물어서 배우며 결코

성정과 언행 등이 특이하거나 괴팍한 것을 들어내지 않았다.

 

 

늙음에 이르기까지 힘을 기르고 충당해온지 오래 되었다. 오로지 돈독하며 후덕하고 튼튼하고 확실한 것에 공력을 쏟아 부었다. 화평하고 즐거운 뜻이 만면(滿面)에 밝게 빛났다. 인애(仁愛)와 충화지기(沖和之氣)가 온몸에 흘러 넘쳐 흥건하였다. 마치 양춘(陽春)에 천지(天地) 음양(陰陽)의 조화로운 기운이 충만하듯 온화하고 윤택하였다. 주위 원근에 비교해 보아도 거의 따라 올 자가 없으며 한나라 때 노공왕의 영광전(榮光殿)처럼 숱한 전란에도 우뚝하게 솟아 있듯 하였다. 이것이 모두 공이 근본에 힘쓴 결과다.

 

 대개 공의 일과(日課)는 단지 이륜(彛倫) 상의 저력(著力)에 공(功)을 드리는 것을 소임으로 여겼다. 지난 일에 대해 공(功)을 많이 드렸다. 특히 부친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부친의 뜻에 맞추어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조금이라도 해이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애쓰고 근신하였다. 어떤 때는 의로운 기개(氣槪)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지만 온화한 음성, 평화로운 얼굴빛을 하며 웃어른의 명령을 좇아 따르고 어른의 뜻에 어긋남이 없게 하는 것이 사친(事親)의 가장 으뜸 되는 일로 여겼다. 이것이 공의 일과(日課)상의 역점(力點)이다.

 

 공은 두 분의 형과 양친이 다 계신 것을 지극한 즐거움으로 여겼다.두 형과 더불어 양친께 아침 문안을 드리고 저녁 잠자리를 봐드리는 즐거움을 벼슬살이로 인해 객지 생활을 하느라 빼앗기는 것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고 몸을 잘 보살펴 건강을 유지하며 특히 상중(喪中)에 더욱 근신하였다. 공은 이와 같이 좋은 일이나 궂은일이나 양쪽 다 최선을 다하였다. 그리고 매일 반드시 사당을 보살폈다. 아무리 바빠도 선친의 제삿날을 맞이하면 부모님 생각을 하며 수심에 잠겼다.

 

 

 날마다 슬퍼하며 사모하기를, 초상 때와 다름이 없었다. 마치 초상을 당해 상주(喪主)가 왼쪽 어깨를 드러내고 머리를 묶은 채 예를 다하듯 하였다. 무덤과 상석 사이 장방형 돌이나 섬돌 등의 의식에 쓰이는 여러 가지 도구나 물건을 마련하는 기쁨으로 슬픔을 잊으려 하였다. 무덤 가까이 지은 집에서 갖은 요리 기구며 제사에 쓰이는 각종 제물을 구비하는 일을 계획하고 조치하는 일에 질서와 조리가 있으며 늘 깨끗하고 명료하였다. 조상 제사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마련한 토지, 제사용 죽기(竹器)에서부터 국솥까지 모든 것을 갖추어 종방(宗祊)은 물론  선친의 신주를 모신 사당에까지 두루 두루 제물을 진설하고 뜰에서 고축(告祝)을 하였다.

 

 처가(妻家)와 방친(傍親)의 제삿날도 반드시 음식물 등의 제물을  갖고 가 부조(扶助)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선조 불천위 충렬공을 위한 별서(別墅)가 있었다. 이것은 농장이나 들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별장 같은 곳이다. 이 집이 오래 되어 재목이 비뚤어지고 허물어져 황폐하였다. 이에 공은 복거(卜居)할 장소로 춘양 현마을을 택하였다. 이곳에는 바위나 돌이 자연적으로 문과 같이 생겨서 하늘에 이어 지듯 하는 고대(高臺)다. 이 주위에 여러 사람과 함께 성력을 모아 집과 정자를 지었다. 그리고 증조부 송서 강운의 문적들을 담은 상자, 즉 비단을 겉에 발라 만든 상자 등이 화재를 당해 흩어지고 없어져 가는 것을 챙겨 모아 지극한 정성으로 대조하고 검토하며 보살펴 문집을 간행하여 후손들에게 전해지도록 하였다.

 

 

 공은 부친이 의양리 만석봉 아래에 있는 언덕바지에 지팡이를 짚고 거닐며 즐기던 곳에 백산정을 짓고 선친의 뜻을 추모하며 여러 대를 지나 후손들에게까지 전해지도록 하였다. 공은 일찍이 자제와 조카들에게 훈계하기를,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난 근본을 잊지 않고 그 은혜에 보답할 줄 모르면 금수(禽獸)와 다를 것이 무어냐”고 하였다. 공은 사친(事親)과 봉선지념(奉先之念)이 이와 같이 철저하였다. 백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애통한 마음 달랠 길 없어 형제 우애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중형(仲兄)을 섬김도 극진하였다. 중형과 8년 차가 나 어렵고 엄하게 느껴지는 지라 공경을 하면서도 마치 친구와 같이 화목하게 지냈다. 중형과 함께 산골짜기 마을 깊은 곳에 살며 형이 이끌고 공은 따라 다니며 갖은 어려움이 닥쳐도 굳세게 이겨내며 서로 기한(飢寒)을 보살피며 사마공의 형제 우애 못지않게 정답게 지냈다.

 

 공은 백형을 섬기듯 종형(從兄) 두암 강횡(姜鐄), 종제(從弟) 매암 강돈(姜金+敦), 고암 강임(姜金+恁)과 천륜지기(天倫知己)로서 어릴 때부터 늙을 때까지 책상머리를 맞대고 책을 함께 읽으며 학문을 강마(講磨)하였다. 인성(人性)과 천명(天命)의 정치(精緻)하고 심오(深奧)한 맛이 스며 나오고 집안 선대의 책모(策謀)와 훈회(訓誨)가 아름다워 마치 새들이 함께 편대를 지어 깊고 넓은 연못 위를 사뿐하게 날며 물과 돌이 어우러진 자연의 경치를 한껏 즐기는 듯하였다. 서로 술자리의 흥을 돋우기 위해 벌주를 내리는 술잔의 주고받는 소리가 아름다웠다. 그러면서도 집안의 절도가 엄격하면서도 고상하고 활달하였다. 학문을 할 때나 거문고를 타며 즐길 때나 모두 하나같이 화기애애하며 흰머리가 나도록 변함없이 함께 즐기며 마치 귀빈을 대하듯 공경하였다.

 

 

 공은 늦게 둔 귀한 아들을 지나치게 사랑하거나 귀여워하여 가르치는 과정이 느슨해지거나 너무 심하게 하여 부작용이 없도록 하였다. 하루라도 공부를 하지 않는 날이 없게 하였다. 그리고 고기를 즐겨 먹지 못 하도록 하고 값비싼 비단 옷을 몸에 걸치지 못하게 하였다. 채소 뿌리 등을 즐겨 먹도록 하였다. 백사(百事)가 여의하도록 신신당부하고 훈계하였으며 그것을 적어 걸어 놓아 익히게 하였다.가계(家戒) 십수(十數) 조(條)를 만들어 이르기를, “충효(忠孝)는 백행(百行)의 근원이요, 근검(勤儉)은 만사(萬事)의 기본이다.” 또 이르기를, “자기 몸을 선(善)하게 하고자 하는 자가 학문을 하지 않으면 자기 몸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자기 자식을 현명하게 하고자 하는 자가 가르치지 않으면 그 자식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하였다.

 

 날마다 되풀이하는 일정한 일이나 그 공부의 과정은 가장 쉽게 하며 효율적으로 하였다. 비록 일과(日課)가 많지 않다하더라도 그것을 반복하고 오래도록 하여 그 효과가 크게 두루 미치게 하였다. 꾸준히 근기(根氣) 있게 하도록 그 교훈으로 “효우(孝友; 효도와 우애), 충신(忠信; 충성과 신의) 관인(寬仁; 관대하고 인자함) 공렴(公廉;공평하고 청렴함) 겸비(謙卑;자기를 겸손하게 낮춤) 절검(節儉;절제와 검소) 입지(立志) 근학(勤學; 부지런히 공부함) 낙선(樂善; 선행을 즐김) 휼궁(恤窮; 굶주린 자를 구휼함) 이십(二十) 자(字)를 손수 적어 모든 손자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내 평생 마음과 힘을 써서 감히 잊지 않은 바다. 너희들은 종신토록 이를  반드시 잊지 말아라. 이것이 인간의 도리이며 가정의 법도다 ”라고 하였다.

 

 

 평상시 생활은 반드시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은 뒤 부모님 아침 문안 인사드리고 저녁에 부모님 편히 주무시도록 잠자리 보살피기를 하였다. 그리고 틈을 봐서 찾아온 손님을 마땅한 예를 차려 대접을 하였다. 가정의 사생활 중 여가가 나면 마음을 맑게 하고 책상을 마주하여 의자에 조용하게 앉자 고요하고 평화롭게 하였다.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게으르고 거만한 마음이 몸에 생기지 않도록 자신을 타이르고 경계하였다. 또한 괴팍한 생각이 마음에 삯 트지 않게 하였다. 비루하고 속된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도록 하였다. 혹은 글을 읽거나 시를 읊기도 하고 혹은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하며 혹은 좋은 글귀를 발췌하여 적어 놓고 음미하였다. 매일 미리 정하거나 예상한 바를 계산하며 문장으로 작성된 규칙을 만들어 놓았다.

 

 공은 일찍이 시를 지어 자신을 경계하기를, “잘못이나 실수가 없도록 말이나 행동에 신경을 쓸 것이며 도(道)를 배움에 있어 그 도(道)의 시초(始初)를 다지는 것이 어려우니 마음이 방만해지지 않아야한다”고 다짐하였다. 대체로 어떤 사실이나 현상 따위가 거듭하여 반복되거나 겹쳐 늘어나며 날카로운 기운이 모아지고 나가려는 마음이 억눌러지며 그 곳에 쑥이나 뽕나무 잎이 우거져 게을러지고 흔들리며 빛이 가려지기 쉽다. 이와 같이 강박 관념이 쌓이면 즉시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관행을 털어버리고 새롭게 태어나도록 하였다. 발을 붙이고 긴장하여 사치하거나 화려하며 허황된 생각을 버리고 실제(實際)에 맞는 건실한 생활을 하였다.

 

 자기의 능력이나 자격에 대한 본분을 알아 자신감을 회복하되 한가하고 자유로운 생활에서 나태해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특히 으슥한 곳에 홀로 있을 때 자기를 단속하고 주관하는 일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였다. 성정(性情)을 기르는데 명리를 탐내지 않고 담박하도록 하였다. 뚜렷한 공적(功績)으로 남는 사업을 정밀하게 추진하려거든 근면해야 하며 풀을 먹는 소가 꼴을 씹으며 삭이듯이 의리를 곰씹으며 즐기되 마치 물을 건너거나 얼음 위를 지날 때처럼 조심하며 뼈를 깎는 노력을 거듭하였다. 그러한 자는 점차 교화가 너그럽고 순후하며 영매(英邁)해진다고 믿었다. 변(變)을 평이(平易)하게 하면 말씨가 온자(醞藉)해지며 몸을 가지는 태도가 단아하고 청백해진다고 하였다.

 

 

 공은 일찍 이르기를, “학문을 하는 것은 별난 일거리가 아니라 단지 일상생활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해서 도(道)에 이르는 것이다.독서는 반드시 고인(古人)의 좋은 말과 착한 행실을 골라 읽어야 한다. 금일의 공부를 해나가면 사람의 도(道)가 쌓이게 되는 것이다.그리고 사람의 성품과 자연의 이치를 공부함에 가장 중요한 것을 매일 밥 먹듯 되풀이 하였다. 특히 경서(經書), 사서(史書), 제자(諸子), 시문집(詩文集) 등을 섭렵하고 먹을 갈아 글씨를 쓰며 책을 읽는 것을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는 수단으로 하였다. 조상 제사나 유림의 활동은 일반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말고 너무 장황하게 하지 않도록 하였다.

 

 일생의 공부는 주자와 퇴계의 서책과 집안에 전해 오는 규범이 되는 것을 위주로 하고 정신을 혼란시키는 잡서들의 범람에 혼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였다. 옛 저작물의 뜻을 음미하고 정교한 사상을 두루 공부하여 확 튀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유유자적하며 저온 숙성시켜 비속(卑俗)한 상태를 차차 신성한 상태로 바꿔 나가도록 힘썼다. 비록 만족스럽지 않아도 자만에 빠지지 말고 시를 읊으며  단정하고 우아하게 인격을 함양하도록 하였다. 서예는 침착하고 무게가 있어야 하며 정미하고 바르도록 하였다. 유문(儒門)의 법도를 지키며 예학에 의거하여 매사를 자세히 처리하고 철저히 실행하였다.의변(疑變)을 당하게 되면 질정(質正)을 구하였다. 자기 자신을 단속하고 용공(用工) 함에 있어 실(實)을 취하였다.

 

 

 사람을 사귈 때는 마음속을 숨김없이 털어놓으며 화친하고 화합을 위주로 하며 결코 귀(貴)를 숭상하지 않도록 하였다. 이해관계에 연연하지 말고 소원해지지 않도록 하였다. 사람을 깔보거나 추켜 세우거나, 슬프거나 기쁘거나, 상고를 당하거나 경사가 있거나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간에 거기에 합당한 예(禮)를 하고 나아가 예물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였다. 주위에 두루 관심을 갖고 문안을 하고 자기를 찾아오는 많은 손님을 현재 세상의 풍속이나 양식에 맞게 접대하였다. 특히 구걸을 하러 오는 자는 반드시 후하게 베풀어 보냈으며 이웃 마을 사람들 까지 따듯한 마음이 전달되도록 사랑을 베풀었다. 이것은 모두 인애(仁愛)에 근거하여 물화(物貨)가 풍요로워지는 것이라 하였다.

 

 아! 슬프다. 선생 송서 강운은 근세에 보기 드문 석학(碩學)이다.수(壽)를 더 누리지 못하여 그 가르침을 다 받지 못한 것을 공은 늘 안타까워하였다. 송서 선생은 오래도록 후손을 일깨우고 번성하도록 이끌어준 어른이다. 그 후손들이 선생의 훌륭한 모습을 닮아 불길이 치솟듯 성대해지고 오색 광채가 찬란해지는 근원이  었음을 공은 그 어느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병자호란 때 낙남한 이래 송서의 원정(園庭)에는 숲의 나무들처럼 후손들이 잘 되어 죽 늘어선 모양이 마치 죽순이 마구 쏟아져 나오고 난초의 싻이 소복하고 아름답게 솟아오르듯 하였다. 그 후손들이 송서가 조성한 문예의 꽃동산에서 여기 저기 부산하게 돌아다니며 유림에 아름다운 꽁지깃을 드리우고 향기로운 찻잎을 무성하게 하였다.

 

 더구나 공은 그 후손 중에 항렬로는 최연소임에도 그 복록이 모두 공에게 쏠리는 광경이었다. 공은 그 기대에 부응하여 보양(補陽)과 양생(養生)에 힘을 기울여 90수(壽)를 누리고 부부가 결혼 60주년 축하 잔칫상을 받고 아들 손자 증손 모두 번성하여 기호 지역의 명벌 노성 명재 윤증 가문의 최근 종손의 무남독녀를 손부(孫婦)로 맞아 그곳까지 외연을 넓힌 인아(姻婭)가 수백명으로  성대하기가 그지없으며 영남 8군에 제일가는 부(富)를 누리며 영남 유림의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공은 오관(五官)의 성화(聲華)는 멀리하고 전원(田園)의 낙(樂)을 누리고 평온한 가운데 학문 강마에 정진하여 일생의 공업(功業)이

성대해진 것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송서 선생의 음덕이 모두 공에게 쏟아졌다 하였다. 공은 항상 근신하며 가득차서 흘러 넘치다가 잘못 되는 것을 경계하며 두려워하였으며 겸양(謙讓)하고 수양하였다. 그리고 근검절약을 강조하여 밥상에 두 가지 고기를 올리지 못하게 하였으며 비단 옷을 물리쳤다. 질박하고 검소 한 것이 공의 집안의 가법이며 군자가 몸소 힘쓸 바라 하였다. 90 평생토록 오직 굳센 정신으로 근신하며 두려워하고 경계할 뿐이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즐겼으며 조기(早期)에 크게 떨치는 것을 경계하였으며 머리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조상의 음덕이 자신에게 너무 과분하게 베풀어지는 것, 즉 선대의 명예로운 동산에서 누리는 만복을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칭송하는 것에 대해 크게 부담을 느끼며 늘 황송하게 생각하였다.

 

 

 지난날 나[유연구]의 아버지와 공은 인연을 맺어 서로 만나 도의로 은근하게 사기기를 약속하고 50년 동안 그 교분이 무척 두터웠다.나는 나의 선친이 돌아가셔서 효도를 제대로 못하고 근심스럽게 지내며 공이 나보다 16년 연상이나 90수를 누리는 공을 내 생애 늙으막까지 모시고 더러 문후를 여쭈러 가면 공은 안석에 기대어 계시는 모습이 마치 옥과 같이 아름답고 살빛이 희고 고결하여 신선과 같은 풍채에 그만 넋을 잃을 정도이었다. 공의 망건과 관자를 멀리서나마 바라보면 선승이 사는 암자의 참선하는 자리에서 나오는 것 같은 향기가 그윽하였다. 더러 공이 우리 집과 주고 받은 간찰 등을 통해 보살펴 주고 훈회(訓誨)하는 그 다정함을 잊을 길이 없다. 세월이 고약하고 어지러워 공과 같이 명망이 높은 원로의 지도 편달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그리워지고 있다.

 

 근자에 공의 아들 강필(姜泌)이 멀리서 나를 찾아와 공의 평생 쌓은 공덕을 글로 적어 남기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나의 보잘것없는 정성으로 어찌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사양을 하였지만 양가가 대를 두고 다져온 정의(情誼)를 생각하여 어쩔 수 없이 강필이 들고 온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내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평생 동안 공을 흠선하며 내 마음에 깊이 감동하여 기뻐하던 일들이 주마등 같이 지나가 지난날부터 감격의 눈물을 흘린 지 오래 되었는지라 창황스럽고 외람스럽지만 그 글자에 방점을 찍고 문장을 구분하고 차례를 매기려니 두렵기 만하였다. 내 지식이 천박하여 거친 언어들을 함부로 찍어 붙여 글을 만들어 보려고 하지만 공의 아름다운 덕성(德性)을 현창(顯彰)하는 데에는 졸렬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해 부끄럽기 짝이 없다. 공을 위하여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한 훌륭한 말들을 전해줄 군자(君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이 글이나마 먼저 남겨 두려한다.